어떤 교회여야 하는가?
일상성이다. 건강한 교회는 교회원의 일상을 풍요롭게 하는 쪽으로 기능한다. 그 반대가 아니라.
그동안 한국교회는 풍족한 인프라로 욕망을 추구하기 용이한 환경이었다. 교회 안으로 무수히 많은 사람과 그에 따른 천문학적인 재정이 흘러들어왔다. 넘쳐나는 인력은 [건물 안의 하나님의 왕국kingdom of God]을 구축하는 데에 동원되었고, 주체가 안 되는 재정은 건물 증개축, 신축 뿐 아니라, 각종 명목의 부동산을 사는 데에 쓰였다. 기도원, 묘지, 교육관, 건축부지, 주차장, 학교 다양한 부지를 마련했다.
그렇게 건물 안의 왕국을 성경적인 하나님나라와 동일시 여겼고, 인적 물적 인프라를 빨아들이고 소비시켰다.
한바탕 좋은 시절이 지나고 난 지금. 그 왕국은 건물만 남은 초라한 성전이 되었고, 사람도 재정도 그 시절 같지는 않게 되었다.
벌써 꽤 지난 시간 한 기독교기업의 사목으로 지냈는데, 담당부서 몇백명을 면밀히 살피고 만나는 경험을 했더랬다. 2년 정도 살갑게 지내니 직원들의 대략적인 생각과 삶을 알게 되었다. 특히, 신앙 리더 역할을 맡은 직원들과는 더 많은 소통이 있었는데, 속사정을 알수록 안쓰러운 마음이 컸다.
일단 직장생활이 생각하던 것보다 버거웠다. 회사 사무실 내부까지 들어가 직장인의 삶을 들여다볼 기회가 없었던지라 짐작만 하고 있었는데, 실제 직장생활은 체력과 멘탈을 임계치까지 밀어붙이는 힘겨운 삶이었다.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같이 커피도 많이 마시고, 대화도 나누려 했으나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다른 하나 그들에게 무거운 짐이 있었는데 바로 교회다.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이들에게 휴일은 쉬는 날이지만, 신앙을 가진 직장인에게 주말은 [또 다른 회사]로 출근하는 날이었다. 두 개의 회사, 두 개의 경영자를 모시는 삶이다.
그리 크지 않은 교회를 출석하던 어떤 직장인은 아내와 둘이 교회 일을 도맡다시피 했다. 남편은 중고등부와 남전도회를, 아내는 유초등부와 여전도회를. 그리고, 그 가정엔 어린 세 자녀가 있었다. 금요일 퇴근 후엔 금요기도회, 토요일 중고등부, 주일엔 찬양인도와 남전도회를 담당했다. 그렇게 주말 직장생활을 퇴근하면 다시 월요일 또 다른 직장으로 출근하는 형태다.
언젠가 둘이 회사 근처에서 저녁을 먹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다 옮기기는 어렵지만, 골자는 교회 이전으로 작지 않은 액수의 헌금을 하게 되었고, 때문에 분양받아 살고 있는 아파트를 처분하고 전세로 옮기게 되었다는 얘기였다. 얼굴이 어두었다. 그러면서 말했다. "목사님, 믿음이 뭘까요?"
얼마 전 어느 사이비 집단을 다룬 다큐가 OTT에서 서비스되며 주목받았다. 파장이 커져 한동안 언론과 미디어에서 다루고, 방송사마다 탐사보도로도 제작했다. 여러 불건전한 포인트가 있겠지만, 그 내용들을 보며 공통적으로 신도들의 깨지고 파괴된 일상이 안타까웠으리라 본다. 가족과 멀어지고, 건강과 재산을 잃고 일상을 잃은 삶. 바로 사이비의 본질은 어떤 교리를 말하고, 어떤 형태로 모이고, 어떤 외형이냐가 아니라 그 안에 모인 이들의 일상을 지켜주지 않고, 집단의 이기적 욕망 만을 추구한다는 데에 있다.
'성도를 동역자로 삼는 교회'. 언제부터인가 나름 의식 있다 어필하려는 교회마다 쓰곤 하는 문구다. 글쎄, 이 표현이 좋은 이미지를 주리라 여기는 건지. 교회가 뭔가. 교회는 성도의 모임이다. 성도가 교회의 주체인데, 누가 누구의 동역자가 된다는 건지. 이는 교회가 성도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반대다. '성도의 동역자가 되어주는 교회'. 이게 맞다.
성도를 온전케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5장 12절.
교회는 성도를 잘 준비시켜(prepare), 자신의 업을 따라 신의 피조계인 세상에서 부지런히 일하고, 이를 통해 세상 문화를 발전시키고, 오염된 죄를 제거하며 살아가도록 그렇게 빛으로 소금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도록(build up) 도와주어야 한다.
그게 세상 가운데 교회를 남겨두신 이유이며, 우리 사회 속의 종교의 건강한 역할이다.
몇 년간의 긴 코로나를 지나며, 다시 교회가 지난 시절을 그리워하는 듯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와 같은 시절이 다시 오기 쉽지 않다. 당시 교회성장시대에는 그럴만한 경제사회적 요인이 있었기 때문이며, 지금은 점차 다원화 돼가는 시절이라 이전과 같은 종교양상을 지니기 쉽지 않다.
역설이지만, 어쩌면 이는 교회에게 오히려 좋은 시절일 수 있다. 또다시 건물 안의 왕국을 건설하고자 하는 종교적 욕망을 원천적으로 지울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그동안 번성한 교회만큼의 진보적인 사회를 우리는 지니지 못했다. 포스트 코로나, 포스트 모너니즘, 포스트 크리스텐덤 뭐라고 불러도 좋을 이 시절에 교회가 성도의 일상을 존중하고, 그들이 사회에서 건강하게 살아가도록,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꿈꾸며 일하도록 도와야 하겠다.
제자도연구소, 황정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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